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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의 한계와 하이브리드의 탄생 역사

스케이트화에 작은 전구를 달고 포르쉐 소년은 빙상에서 미끄러졌다. 그것은 후에 전기 레이싱카 개발로 결실을 맺었다.
전지는 사용하면 반드시 소진되고 만다. 소진되지 않는 영구전지는 아직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충전하면 된다고 할 수 있지만 배터리에는 수명이 있다. 가솔린 엔진이 아직 미성숙 단계였던 약 100여년 전, 자동차의 3분의 1은 전기자동차였다. 그리고 저 유명한 포르쉐도 과감하게 도전해 하이브리드카를 완성시켰었다.

환경친화적인 자동차로서 전기자동차가 새로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자동차 메이커들은 물론이고 전력회사등도 참가해 그 개발은 급 피치로 진척되어 오늘날에는 극히 소수이지만 연구소 사내용 차라든가 하는 형태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가솔린 엔진과 전기 모터가 결합된 소위 하이브리드카도 새로운 제안으로서 부상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토요타 프리우스가 실용화에 성공해 세계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전기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배터리의 개발이 급선무라고 하는 것. 이 점에서 결정적인 해결책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연료전지, 측 퓨얼 셀도 상당한 주목을 끌며 세계 각 메이커들이 앞 다투어 개발을 하고 있지만 이 역시 아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다.

전기자동차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가솔린 자동차의 탄생은 1886년이었으나(칼 벤츠의 3륜차 완성) 20세기가 시작되기까지는 육상의 수송도구는 가솔린차, 증기차, 그리고 전기자동차에 의해 3분되어 있었다.

특히 가솔린차는 기계적인 결함이 많고 소음도 심했기 때문에 유럽, 미국의 상류층 사람들은 전기자동차를 애용했었다. 그리고 가솔린차의 개발이 주로 프랑스의 푸조, 파나르 에 르와슬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성능면에서도 위 세 가지 차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상 최초의 시속 100km를 돌파한 것은 프랑스의 드 데일쉬사의 전기자동차로 유선형 보디를 갖고 있었다. 벨기에 사람인 까뮤 제나티는 ‘라 자메 콘탄트(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고 이름 붙인 이 차로 1899년 4월 29일 플라잉 스타트로 1km 구간을 34초로 주파해 105.882km/h의 대기록을 수립했다. 가솔린차가 100km/h의 벽을 돌파한 것은 3년 후인 1902년의 일이었다. 롤스로이스로 알려진 CS롤스는 이 때 프랑스의 모르즈차로 101.5km/h를 마크했는데 제나티의 기록에는 약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자동차 기술에 관한 영웅적인 존재인데 그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전기자동차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매달렸었다.
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 내에 있었던 보헤미아(후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마펠스도르프에서 1875년에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기술적인 실험을 좋아했다. 특히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전기에 강한 관심을 나타냈다.

마펠스도르프의 어린이들에게 있어 겨울에 가장 즐거운 것은 스케이트를 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두워지면 그마저 할 수 없었다. 유소년인 페르디난트는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다. 좌우 스케이트에 작은 전구를 달고 바지의 포켓에 넣은 배터리로부터의 배선은 역시 바지를 통해 연결했다. 어린이들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빛의 움직임에 매료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페르디난트의 아버지 안톤은 시골에서 양촌 세공직으로 크게 일을 벌이고 있었는데 장남이 가업을 잇지 않는다는 데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전기에의 심취는 강해져만 갔다. 13세 때에 아버지의 공장에 전기로 작동되는 종을 설치했고 18세가 되어 발전기를 직접 제작해 자기 집에 전등을 달아 안톤을 놀라게했다.

안톤은 페르디난트가 라이헨비르크에 있는 국립기술학교의 야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고 빈으로 나가는 것도 용인했다.
거기서 그는 전기관계회사에 근무하게 되었고(1893년 4월) 빈 공과대학의 청강생으로서 야학을 했다.

그가 근무한 벨라 에가사에서 페르디난트는 전기기술을 성실히 습득해 1897년에는 지배인의 조수로 근무하며 테스트부의 주임이 되었다. 이 사이 그는 전기자동차를 만들었고(97년) 그 휠에 연결된 전기모터 시스템은 약 80년의 공백 후 오늘날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구동방식이다.

그 즈음 빈의 마차 메이커 로넬사는 전기자동차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1900년 초 여름 페르디난트는 동사에 초빙되어 그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앞바퀴에 허브 모터를 장착한 앞바퀴 구동방식이었다. 그 모델의 우수성을 실증하기 위해 그는 직접 레이싱 타입을 제작해 제메링크의 힐클라임에 스스로 운전해 출전, 당시의 전기자동차로서는 이례적인 40km/h의 속도를 마크했었다.

1900년의 파리국제박람회 출품작의 하이라이트는 뭐라해도 최신의 과학기술의 성과를 수많은 기계, 장치류였다. 19세기말부터 급속하게 발달한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엄청난 신세계를 약속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게 되었다. 전동 컨베어, 최신 공작기계, 에디슨의 X선 카메라, 기관총, 그리고 물론 자동차도 여러대가 출품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빨리 자동차 제작에 손을 댔던 로넬사도 나라를 대표하는 형태로 새로운 전기 시에즈(2인승 2륜 마차를 의미)를 출품했다. 새로운 방식의 허브 모터 구동 시스템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약관의 포르쉐(당시 25세)는 처음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하지만 무거운 연산전지라고 하는 지금도 변함없는 핸디캡이 있는 전기자동차는 급속히 발전을 거듭해 오는 가솔린 자동차에 성능면에서 크게 뒤떨어지기 시작했다. 1901년에는 다이믈러사에서 빌헬름 마이바하 설계의 메르세데스가 데뷔했고(1901년) 그 속도는 가볍게 100km/h를 돌파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포르쉐는 가솔린 엔진으로 발전, 허브모터로 앞바퀴를 구동하는 믹스테(영어로는 하이브리드) 타입을 개발했다. (1902년) 그 시스템은 크게 달라졌지만 아이디어로서는 최초 양산 하이브리드카인 토요타 프리우스의 먼 원조인 셈이다.

로넬사에서의 자동차 개발은 속도가 느려 1905년 포르쉐는 아우스트로 다이믈러사에 입사해 거기에서 기사장으로 일하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는 프린츠 하인리히 트라이얼을 위한 포르쉐사의 순 가솔린 엔진차(1911년에 우승)도 있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타입의 버스와 오스트리아 육군을 위한 중포 견인차 등도 만들었다. 하이브리드 타입은 포르쉐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위대한 자동차기술의 개척자였던 것은 그 업적이 확실히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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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oo M.D. Trackback 0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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